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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구로사와 아키라 (Akira Kurosawa, 黑澤明, くろさわあきら)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일본

출생:1910년 (양자리)

사망:1998년

직업:영화감독

데뷔작
1962년 <쓰바키 산주로>

최근작
2020년 10월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1910년에 태어난 구로사와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의 책을 탐독하고 미술에 관심을 기울인 사춘기를 보내고 36년 24살 때 도호 영화사에 취직했으며 연출부 말단부터 차근 차근 길을 밟아 33살 때인 43년 <슈가타 샨슈로>로 데뷔했다. 비교적 과작인 구로사와의 전성기는 50년대. <라쇼몽>이 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구로사와의 운이 트였다.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두고 산적과 사무라이의 아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과 나뭇꾼의 증언을 교차시킨 이 영화는 일본 시대극을 '현대화시킨' 구로사와의 취향이 잘 드러난다. 초반부에 나뭇꾼이 숲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장면에서 라벨의 음악 '볼레로'를 깔면서 다양한 촬영각도로 나뭇꾼의 행동거지를 잡아낸 연출은 당시 일본영화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구로사와의 서구식 화술은 또 다른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돋보인다. 산적들의 습격을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사무라이들을 고용해 산적들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서부영화를 빼닮았다. 이 영화 속의 사무라이들은 서부에 문명화된 사회의 기초를 닦기 위해 무법자들을 제압하는 존 포드 서부극의 총잡이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잘 다듬어진 일본식 정원처럼 세세한 인공적 솜씨를 느끼게 하는 구로사와의 연출은 존 포드식의 고전영화 화법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빠른 이동촬영과 편집으로 극적인 장면에 방점을 찍으면서 구로사와는 자신의 영화에 서명을 남겼다. 이 영화는 공동체의 단결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동선을 원 형태로 연출한 '원구도'로도 유명하다. 구로사와는 자기 영화에 가부끼의 연기양식을 곧잘 도입해 꾸미는 것으로 서구와 일본의 접합을 꾀했다.

서구양식과 일본적인 것의 절충이라는 구로사와 형식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를 일본식으로 옮긴 <거미의 성>에서 절정에 달했다. 헐리우드 영화를 뺨치는 규모의 스펙터클에다 셰익스피어라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예술성을 갖춘 이 영화는 일본 봉건시대의 역사에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녹이되 하얀 마스크를 쓴 것 처럼 진하게 화장한 등장인물들의 양식화된 몸짓에 일본전통예술인 가부키와 노의 양식을 섞은 장관을 연출했다.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 <악인이 더 편히 잠든다>, <요짐보> <쓰바키 산주로> 등으로 시대극과 현대극에 두로 능했던 구로사와의 전성기는 <붉은 수염>을 고비로 하깅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일본영화산업이 기울고 구로사와의 영화도 높은 제작비에 비해 흥행을 보장할 수 없음이 증명되자 구로사와는 일본영화계의 기피인물이 됐다. 폭스에서 제작한 <도라, 도라, 도라>의 감독직에서 해임된 후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은 구로사와는 최초의 색채영화인 <도데스카덴>마저 흥행에 실패하자 자살을 선택했다.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는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구로사와는 그 이후 외국자본을 출구로 삼아 소련에서 제작비를 댄 <데루스 우잘라>를 시작으로 일본과 미국 합작의 <카게무샤>, 프랑스 자본의 <란>, 미국 자본의 <꿈>을 연출했다. 만년의 두 작품인 <8월의 광시곡>, <마다다요>만이 일본자본으로 제작됐다. 구로사와의 후기 걸작은 <카게무사>였으며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보증을 서고 20세기 폭스가 제작비를 댄 이 영화는 장대한 역사허무주의를 보여주는 예술적 스펙터클로 칸 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구로사와의 후기작들은 화려하고 탐미적인 영상에 탐닉했으며 뭔가 허전한 느낌을 준다.

영화사가인 제랄드 매스트는 구로사와가 전통적인 일본영화의 명상적인 리듬보다는 미국영화의 날렵한 속도감을 영화에 받아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가부키와 노의 정적인 리듬과 화려한 이동화면, 극단적인 딥 포커스 촬영을 적절히 배합해 기존의 영화예술의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미학적 영토를 개척했다. 구로사와는 또 잘 가꿔진 일본식 정원같은 단아한 인공미의 정수를 영화에서 보여줬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이제는 보기 힘든 대가의 웅혼한 연출력을 보여줬으며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대 일본영화의 전설이었다.

그는 76년 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문화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이때 수상 소감으로 '영화에 대한 정치의 무관심'을 비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80세 넘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 90년에 동양인으로 최초로 아카데미상 특별 공로상을 받았고, 91년엔 〈8월의 랩소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그 후 지병으로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47년 동안 28편 밖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그는 98년 9월 6일 88세로 사망했다. 일본 영화계에선 '패전 후 침체돼 있던 일본사회에 희망을 준 영화인'이라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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